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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경제주체

[노란들판] [사회적기업이 희망이다](27)

[사회적기업이 희망이다](27) 노란들판

야학부터 일터·직업훈련까지… ‘장애는 없다’
3년 전 작업장 출발… 현수막 만들며 꿈꾸는 일터로
관공서·시민단체가 주문처… 고객층 다양화 나서
 


사회적기업 탐방단이 지난달 11일 서울 광진구 구의2동 사회적기업 노란들판을 방문해 박경석 대표(오른쪽)로부터 실사출력기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삼일회계법인 이진성·한세정 회계사, YeSS 신지혜·방현석·김현주씨, 박 대표. 김세구기자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어 손과 목을 쉽게 가눌 수 없는 유정윤씨는 사회적 기업 노란들판의 고참 직원이다. "언제부터 일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이라며 인터뷰엔 쑥스러워 하지만 출력기를 다뤄 현수막을 뽑아내는 과정을 해낼 땐 손놀림이 거침없다. 노란들판은 유씨 같은 중증장애인 10명과 일반 직원 7명이 함께 일하는 일터이다.


현수막 제작 업체인 노란들판은 장애인의 직업재활을 위해 2006년 출범한 작업장이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장애인들 가운데 검정고시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을 도운 '노들장애인야학'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설립됐다. 1993년 설립된 '노들장애인야학'은 장애인 인권운동단체인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가 주도한 장애인 공부방이다. 노란들판의 박경석 대표는 야학을 만드는 과정부터 함께 했다. 사회적기업 노란들판을 얘기하려면 노들장애인야학부터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 야학에서 장애인 일터까지 장애인 인권운동이 자연스럽게 진화한 것이다.

박 대표는 "일반인의 대학 진학률은 점점 높아지지만 장애인의 교육수준은 여전히 매우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며 "노들장애인야학은 장애인에게도 교육이라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움터"라고 말했다. 짐작대로 국내 장애인의 교육 수준은 낮은 편이다.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최종학력은 무학을 포함한 중학교 이하의 학력이 65.4%로 3명중 2명 꼴이다. 중증장애인의 학력은 더 떨어진다.

그나마 어렵사리 교육을 받았다 해도 장애인이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기업에서는 장애인 고용을 꺼리고 있다. 다른 모든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영받지는 못해도 배척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교육부터 고용까지 모든 곳에서 장애인차별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박 대표의 말이다. 장애인 고용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장애인 의무고용제도'가 1991년부터 시행되고 있기는 하다. 현재 50인 이상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주는 전체 인원의 2% 범위 내에서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의무고용률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노동부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공개한 장애인고용률 현황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의 평균 장애인고용률은 1.72%로 여전히 법정 고용률인 2%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고용률은 올해부터 3%로 높아져 고용이 늘어나야 하지만 가시적인 조치는 목격되지 않고 있다. 기업들은 의무고용률을 못 지켜 문제가 되면 그냥 '부담금을 내고 만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장애인 교육을 목적으로 한 야학이 장애인들이 주인이 되는 직장인 노란들판으로 이어진 배경이다. 2006년 노동부 공공근로사업인 사회적 일자리로 시작했고 2008년 7월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일터'의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노란들판이 이미 과포화 상태인 실사출력 업계(현수막)에서만 승부를 보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현수막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지만 인쇄디자인 쪽으로도 업무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다.

현수막제작은 디자인에서 출력까지 작업장에서 모두 해결된다. 작은 안내책자(리플렛)나 간단한 디자인의 포스터는 시안 작업을 해서 충무로의 인쇄소에 넘긴다. 지난해 매출은 1억8000만원. 최근 2년간은 쓰러지지만 않으려고 버틴 나날이었다. 최저임금 기준을 맞춰 인건비를 지급하고 사무실 운영비를 대다 보면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단기적으로 월 매출 3000만원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현수막사업은 마진이 박해 인쇄 쪽의 수익성이 더 높지만 인쇄설비를 직접 갖출 여력이 아직은 없다. 전문적인 인쇄디자인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도 고민거리다.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장애인 일터'를 안착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일까, 노란들판의 슬로건은 '꿈꾸는 현수막'이다. 처음에는 야학을 졸업한 사람들을 주로 고용했지만 이후 교육사업을 통해 야학을 다니지 않았던 사람도 채용했다. 지금은 야학에서 출발한 사람이 3명이고 나머지는 공개모집을 통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직업훈련은 노란들판의 또 다른 사명이다. '사랑의 열매'로 유명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중증장애인 취업프로그램을 통해 2007년 한해에 걸쳐 약 20명의 장애인에게 직업교육을 실시했다. '디지털프린팅 잡(job)자'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통해 최종 4명이 노란들판에서 6개월 견습훈련을 받았다. 이 가운데 3명이 남아 현재까지 디자이너와 출력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디자인 부서에서 일하는 조수안씨는 청각장애인이다. 조씨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 출신. 2007년 5월 이곳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아르바이트 직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디자인 일을 하니 나름대로 전공과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일 하는 재미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조씨와 함께 일하는 또 다른 디자이너 공대식씨는 마우스를 쥔 한 손만을 움직일 수 있는 지체장애인이다. 이들에게 진짜 난관은 현수막 디자인이 아니라 일상업무이다. 청각장애인인 조씨 등은 직접 주문을 받고 고객과 수정사항을 협의해야 하는 전화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 고용촉진공단에서 파견된 지원인력 두 사람이 서류작성과 전화업무를 돕는다.

직원들은 "장애인작업장이라고 해서 '품질은 과연?'이라는 물음표는 사양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 해도 다른 업체와 마찬가지로 소소한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배달과 관련된 사고가 가장 많다. 주문자의 예전 주소로 물품을 보내거나 송장번호를 잘못 기입해서 엉뚱한 곳으로 배달되기도 한다. 기자회견이 있다며 바로 전날 주문이 들어올 때가 있다. 야근이라도 하며 현수막을 만들지만 오전에 일찍 열린 기자회견 시간에 제대로 맞추지 못해 예정보다 30분 늦게 배달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너무 죄송하고 민망하지만, 그래도 주문을 끊는 거래처는 없다. 사고율이 다른 업체들에 비해서 높지는 않지만 사고가 생겨도 거래 취소로 이어지지 않는 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인 셈이다. 그럴수록 더 업무에 만전을 기하자고 노란들판 식구들은 결의를 다지곤 한다.

노란들판 주문처의 90%는 관공서나 시민사회단체다. 별도로 홍보하지 않기에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개인 고객은 거의 없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알음알음 소개를 통해 노란들판을 찾아온다. 관공서의 주문은 노란들판의 현수막이 장애인 생산품으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4년 장애인복지법을 통해 장애인 생산품 의무구매를 제도화했다. 현재 18개 품목에 대해 장애인 생산품 의무구매비율이 지정돼 각급 공공기관에서 준수되고 있다. 현수막의 의무구매비율은 5%다.

고객층을 다양화해 매출을 늘리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을 구축 중이다. 홈페이지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조금 더 일반 소비자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매출 확대도 중요하지만 '꿈꾸는 현수막'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꿈을 꾸는 게 즐거움이다.



경향신문|안치용 ERISS 소장· 신지혜(이화여대 3년)·김현주(중앙대 2년) 

|입력2009.10.04 17:26|수정2009.10.0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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