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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경제주체

[노란들판] [김규항의 좌판](4)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박경석

도가니? 장애인이 갇혀 사는 것에 대한 담론이 없었다 

박경석은 스물다섯 살 때 행글라이더 사고를 당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지만 장애인으로 살 거라곤, 더구나 장애인 운동가로 살 거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니면서 데모 한번 안한 '제법 놀 줄 아는 날라리'였던 그는 철로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청와대 행사에서 대통령과 언쟁을 벌이다 들려나오고, 국회의원 자리마저 고사하는 비타협적인 투사로 변신했다. 그러나 25일 혜화동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만난 그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김규항 = 장애인 운동에 굳이 '진보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가 뭔가.

박경석 = 장애인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시각들이 있는데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비장애인과 사회로부터 눈물을 자아내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주류다. 진보적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들의 권리가 보장되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지난달 25일 인터뷰 도중 휠체어를 탄 채 서울 혜화동 대학로 거리로 나왔다. 이곳에는 그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실천 공간으로 삼고 있는 노들장애인야학이 있다.

김규항 = 동정과 시혜의 관점은 장애인 운동의 주류이자 사회적 시선의 주류이기도 한데.

박경석 = 우리 사회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시혜와 동정, 불쌍하다 이상의 생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래 < 도가니 > 라는 영화가 화제인데 영화가 나오기 십년 전부터 피터지게 싸웠고 묻혔었다. < 도가니 > 가 문제를 환기한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 영화를 둘러싼 시선과 관심 역시 주류의 틀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김규항 = < 도가니 > 는 이른바 시설의 문제를 다룬 영화다. 틀을 넘어선다는 건 무엇보다 시설을 넘어선다는 건가.

박경석 = 그렇다.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살아가게 하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임을 기억해야 한다. 장애인이 시설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도 인정해주고 활동 보조가 필요한 사람은 활동보조자를 24시간 두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설에 들어가는 돈과 지원을 지역 사회로 돌리면 가능하다. 그게 안 되는 건 시설, 즉 사회복지 법인들이 사유화된 기업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걸 해결하려는 장치가 공익 이사제인데 사유재산 침해라는 주장에 밀려 버렸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와 닿아 있다.

김규항 = 신자유주의적 흐름은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만들 수밖에 없겠다.

박경석 =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는 바로 사회복지의 신자유주의화 시장화로 이어진다. 복지 법인을 하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장애인의 권리는 후퇴하거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김규항 = 근대 이전에 장애인은 본인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신의 벌을 받는 죄인으로 취급되었는데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장애인은 죄인인 것 같다.

박경석 = 자본주의는 경쟁과 속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뒤처지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으니 장애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셈이다. 뒤처지는 게 죄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는 세상으로 가는 운동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 체제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

김규항 = 외국의 경우는 어떤가.

박경석 = 일본의 경우를 보면 예전엔 < 도가니 > 같은 인권 유린이 있었고 그걸 해결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시설을 극복하려고 '내 신체성이 자본주의 거부한다'는 구호를 내건 급진적인 장애인 운동이 활발했는데 이젠 대부분 사업 기관으로 흡수되어 버린 상태다.

김규항 = < 도가니 > 같은 인권유린도 문제지만 장애인운동이 체제 내로 흡수되어 사멸하는 상황도 참 무서운 것이다. 이명박과 수구 세력을 극복하는 게 진보운동의 유일한 목적이 되면 진보운동이 자유주의 세력에 흡수되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운동의 하한선을 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원순씨가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와 대기업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기자들 앞에서 하소연하는 걸 보며 민망했다.

박경석 = 결벽증이라 오해할 분들도 있겠지만 그런 돈을 받으면 운동을 압박하고 종속해서 결국 체제 내적인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극우세력이 '좌빨'이라고 해준다고 진보운동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도 어렵다고 하니 시민들의 후원이 전부인 우린 좀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500일 농성'까지 해가며 10여년을 뼈빠지게 투쟁했는데 먹고사는 문제와 미래 문제로 고민하는 걸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김규항 = 시민들의 대가 없는 후원이 많아져야겠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자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장인데 두 활동을 조화시키는 게 어렵진 않은가.

박경석 = 같이 잘 하려고 한다. 노들장애인야학은 교육 적령기를 놓친 장애인들이 오는데 기본적인 학과공부도 하지만 장애인 문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교육받고 함께 실천하는 공간이기도 해서 운동과 분리되지 않는다.

김규항 = 학생들이 그런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감하기까진 갈등도 있겠다.

박경석 = '1 더하기 1은 2'를 배우러 왔는데 갑자기 데모를 하니 의구심이나 갈등도 많다. 그러나 곧 '나를 위해 너무나 당연한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사들도 운동이 아니라 그냥 가르치고 싶어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 노들야학의 지향점을 놓고 토론이나 논쟁이 아주 많다. 모든 학생과 교사가 조금은 다르면서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나아가는 상태가 된다. 이 공간을 통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노들'이라는 말 그대로, 노란 들판에서 평등하게 함께 나누는 삶을 꿈꾸게 된다.

김규항 = 노들야학에서도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데 그런 공부와 철학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공부는 어떻게 병행되나.

박경석 = 둘을 한데 녹여내려 한다. 한글을 못 쓰는 장애인들에게 '철수야 영희야' 가르치는 것하고 '활동 보조' '이동권 권리' 같은 단어를 써서 가르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

김규항 = 순진한 장애인을 의식화하려는 게 아니라 장애인들의 실제 일상의 언어일 뿐이다.

박경석 = 일반 교과서는 장애인 자신의 삶과 관련된 단어는 없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교육, 훈시적 교육이 아니라 주체들이 대상들이 함께 동참하는 교육이어야 하고 그에 따른 교육 과정, 교재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규항 = 내 살림 챙기기도 어려운데 다른 진보운동과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려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박경석 =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문제가 풀리면 장애인 운동이 자동으로 풀리는 건 아니지만 노동자의 문제 해결 없이 장애인 문제만 풀릴 수도 없다. 설사 풀린다고 해도 올바르게 풀리는 게 아니라 망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자본과 노동의 계급 갈등과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는데 장애인이 행복할 수 있는 건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치장거리로 이용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장애인을 내세우면 얼마나 생색내기 좋은가.

김규항 =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행사에서 대통령과 언쟁을 벌이다 경호원들에게 들려나온 사건이 떠오른다.

박경석 =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정부의 치적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만든 건 물론 잘했지만, 장애인 부모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단식 농성하고 있었고 사회복지 시설 비리 때문에 계속 투쟁하고 있었고 그리고 활동보조인 서비스의 시장화 정책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었다. 나는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대통령이 서명하기 전에 우리 장애인들이 밥을 굶으며 투쟁하고 있는 문제를 먼저 알고 서명했으면 좋겠다, 대통령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했는데 대통령은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만들었으니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이런 이야기만 하고 싶어 했다. 결국 대통령의 지시로 들려 나갔다.

김규항 = 당시 복지부 장관이 유시민씨였는데 복지를 모조리 시장주의 원칙으로 설계하는 바람에 지금도 애를 먹고 있는데.

박경석 = 이를 테면 활동보조인 서비스 자부담률이 4만원에서 8만원으로 올랐다가 이젠 몇십만원으로 올라버렸는데 그 때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시장주의 원칙이 아니라 복지원칙으로 만들어놓았으면 이명박 정권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었다.

김규항 = 2004년 총선에 민주노동당 장애인 비례대표로 추천받았었는데 고사했다. 당시 순위로 볼 때 수락했으면 국회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면 장애인 운동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도 많았을 텐데. 옛날에 단병호 선생도 '노동자 국회위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한 적이 있고 스스로 하기도 했다.

박경석 = 당시 장애인 문제에 대해 현실적 판단으로 따지면 국회의원이 되는 게 좋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런데 사회변화라는 게 아래로부터의 든든한 기초, 사회 운동, 투쟁을 잘 할 수 있는 대중적인 조직, 건강한 소통 이런 활동들이 더 중요한 것이지 제도 하나 바꾼다고 그래서 예산이 조금 더 늘어난다고 바뀌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4년을 싸워서 '교통약자 편의증진법'을 만들었는데 예산이 없다고 안하는 걸 보면서 법 하나 만들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구나, 단체 예산 따는 거, 운영비 예산 따는 건 잘 할 수 있겠지만 보편적인 권리를 만드는 투쟁은 제도 하나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제도가 주는 함정도 경계해야 하고.

김규항 = 자칫하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세상을 본다거나 교조주의적이고 독불장군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사실 우리 사회의 주요한 사회변화는 4·19부터 민주화, 촛불시위까지 의회정치가 아니라 시민들의 직접 행동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다. 그런데 선거 때만 되면 '최악은 막아야 된다'느니 '현실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느니 해서 국회의원이 몇 명이 되느냐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전부 쓰나미처럼 휩쓸려가 버리는 게 사회 진보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런 면에서 열악한 장애인 운동의 중견 활동가가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건 참 소중한 일이었다.

박경석 = 그때 국회의원이 되었다면 나는 그걸로 끝났을 것 같다. 노년은 좀 편안히 보낼 수 있었겠지만.

김규항 = 제일 힘 빠질 때는 어떤 때인가.

박경석 = 싸움의 대상이 강해서 이명박 정부가 너무 탄압하기 때문에 힘이 빠지진 않는다. 오히려 힘이 나고 운동을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정말 힘이 빠지는 건 지난 10여년의 활동에 대해, 직접행동의 투쟁 방식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낡았다고 충고할 때다. '몸으로 부딪히고 천막치고 농성하는 것 가지고는 요즘 씨알도 안 먹힌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김규항 =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시위의 방식을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촛불 들고 평화 행진하고 기자회견하는 것만으로 할 수 있다면 안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없는 형편에 벌금 받고 영장받고 하는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굳이 길에서 싸우고 천막치고 농성하지 않으면 꿈쩍도 안하는 주제가 있는 건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구시대적 방식'이니 한다.

박경석 = 안타깝다. 사실 몸을 쓰는 싸움은 우리 싸움의 일부일 뿐이다. 트위터도 하고 토론도 하고 문화제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가능한 한 부드럽고 온건한 방식을 선택하려 해도 몸으로 할 수밖에 없는 싸움도 있다는 걸 함께 인정하면 참 좋겠다.

김규항 = 가장 행복할 때, 이렇게 살기를 잘했다 싶을 때는 언제인가.

박경석 = 노들야학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가 가장 재미있고 행복하다. 나는 해병대 출신에 1980년대 그 엄혹한 시절에 대학을 다니면서 데모 한번 안한 날라리였다. 그게 정상적인 삶인 줄만 알았던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노들야학 덕이고 동지들 덕이다.

김규항 = 행복해 보인다. 10여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오랜 농성으로 심한 욕창에 걸린 상태였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행복해보였다. 선생의 삶과 선택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생각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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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입력2011.11.01 22:06|수정2011.11.0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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